1936년 하계 올림픽과 일장기 말소 사건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의 하이라이트인 마라톤 경기는 우승 후보로 꼽히던 아르헨티나의 사발라와 손기정 선수의 다툼이었습니다. 처절한 사투는 후반의 막바지 코스인 비스마르크 언덕에서 손기정 선수가 앞서 가던 사발라를 추월하면서 결판이 났습니다. 이로 인하여 손기정 선수는 마라톤에서 우승하였습니다. 아돌프 히틀러는 경기 다음 날 손기정 선수를 면담하고 격려하였습니다.손기정 선수는 42.195km를 2시간 29분 19.2초에 주파해 당시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땄습니다. 이때 손기정 선수와 함께 출전하였던 남승룡이 동메달을 차지하였습니다. 1936년 당시에는 대한제국이 일본의 지배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일본 대표팀에서 뛰어야 했고, 이름의 로마자 표기도 일본식으로 읽은 손 기테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손기정 선수는 한국어 이름으로만 서명했으며 그 옆에 한반도를 그려 넣기도 했습니다. 인터뷰에서도 그는 자신의 모국이 한국이라고 밝혔습니다. 시상식 때도 태극기가 아닌 일장기가 올라오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는 경기 후 일본 선수단이 여는 축하 파티에 참석하지 않고 베를린의 조선인 두부공장에서 열린 우승을 축하하는 모임에 참석하였습니다.당시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가 그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워 버린 일장기 말소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으로 동아일보 사회부장이었던 현진건이 1년간 감옥에서 복역을 하는 등 언론노동자들이 탄압을 당했으며, 손기정 선수도 조선에 귀국할 당시, 환영 대신 경찰들로부터 연행 마냥 대우받았고 전차를 타는 것조차 일본의 감시를 받아야 했습니다.손기정 선수는 유럽 여러 나라와 인도를 거쳐 싱가포르에 도착했을 때 그는 선배로부터 “주의하라. 본국에서 사고가 나서 일본인들이 너희를 감시하라는 전문이 선수단에 들어왔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동아일보가 손기정 선수 가슴의 일장기를 지워 게재한 사실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신문이 정간되고 많은 기자가 복역을 하는 등 고초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손기정 선수는 ‘다시는 마라톤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재차 다짐했습니다. 가는 곳마다 일본 경찰이 손기정 선수를 감시했습니다. 마치 사상범을 다루듯 몸을 검색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마라톤 우승을 반납하고 싶다”라고 까지 말했습니다. 광복 이후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대한체육회 부회장, 1963년에 대한 육상경기연맹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1966년 아시안 게임에서 한국 대표단장으로 참가하였습니다. 1971년에는 올림픽 위원회 위원, 1981년부터 1988년까지는 서울 올림픽 조직 위원을 역임하였고, 1988년 서울 올림픽 개회식에서 성화 봉송 최종 주자로 나서 전 세계인의 안목을 집중시켰습니다. 각각 1947년과 1950년에 코치직으로 활동하여 보스턴 마라톤에서 우승한 마라토너 서윤복과 함기용의 코치로 활동해 이들을 훈련시켰고,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황영조는 손기정 선수가 자신의 정신적 지주였다고 밝혔습니다. 1983년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 자서전을 통해 당시 상황과 심정을 밝혔습니다. 고려대학교에서 경영학과 명예졸업장을 전달했습니다. "모든게 길이었고 모든 곳을 달렸다, 오로지 달릴 뿐이었다" 손기정.